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 (문단 편집) == 평가 == 과거에는 독일계 귀족들을 누르고 러시아풍을 회복하여 러시아 민족사학의 영향으로 평가가 후했는데[* 특히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게 [[프리비슬린스키|러시아령 폴란드]]를 [[폴란드 섭정왕국|강탈당한]] [[제1차 세계 대전]]과 [[독소전쟁]]으로 수많은 소련인들이 죽어나간 [[제2차 세계 대전]]을 기점으로 러시아의 반독감정이 강해지면서 옐리자베타의 이러한 정책이 더욱 좋은 평가를 받았을 것이다.] 현재는 독일계 귀족들을 등용해서 그동안 저평가 되었던 안나 이바노브나가 다시 재평가받는 것과 달리 옐리자베타는 지나치게 고평가받았다는 평가를 받아 현재 학계에서는 평가가 많이 내려갔다.[* <러시아의 역사> -니콜라스 V. 랴자놉스키(NICHOLAS V. RIASANOVSKY)-] 특히 외교 정책에서 그녀가 프로이센을 적대한 이유는 발트해에 러시아의 영향권을 두고 프로이센의 힘이 강해질까봐 합스부르크 제국과 손잡은 것이었는데 '''정작 프리드리히 2세는 발트해에 관심이 없었다.'''[* 다만 이와 별개로 옐리자베타 여제가 개인적으로 프리드리히 2세를 좋아하지 않은 것도 있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 전까지 전통적으로 유럽 국가들 사이에선 위협이 되거나 만만치 않게 성장할 가능성이 높은 국가들은 다구리해서라도 일찌감치 밟아버리는 일종의 전통(...)에 기인한 견제 차원일 수도 있다. 실제로 7년 전쟁 이후부터 프로이센은 명실상부 유럽의 강대국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이 외에도 그녀는 동맹이었던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를 시기했으며, 자신에 대한 쿠데타 모의에 오스트리아가 개입했다고 생각하기까지 했다.] 무엇보다 [[표트르 대제]]의 혈통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표트르 3세를 후계자로 정하여 상술한 것처럼 표트르 3세의 무조건 평화 협정으로 인해 프로이센에 유리하고 러시아에 불리한 역사가 전개된 점은 옐리자베타 여제의 책임이 큰데, 반프로이센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친 주제에 엄청난 친프로이센 성향의 후계자를 들였다는 것 자체가 심각한 오류라고 볼 수 있다. 차라리 [[류리크]]의 후손들 중 한 명을 후계자로 삼아 [[류리크 왕조]]를 부활시키거나, 로마노프 가문의 다른 방계 후손들 중 한 명을 후계자로 삼는 등 표트르 3세보다 좀 더 능력이 좋은 다른 사람에게 황제위를 물려줬다면 후계자 문제에 있어서는 조금이라도 나은 평가를 받았을 것이다. 다만 후계자 문제는 살짝 옹호의 여지가 있는데 그 당시 로마노프 가문의 혈통을 이은 후손이 [[표트르 3세]]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표트르 1세]]는 원래는 14명이나 되는 자녀를 뒀으나 성인으로 자란 건 [[알렉세이 페트로비치 로마노프|알렉세이 황태자]]와 [[표트르 3세]]의 어머니인 안나 그리고 옐리자베타 뿐이었다. 알렉세이 황태자는 1남 1녀를 낳았으나 모두 혼담을 앞두기 전에 죽었고 안나 역시 [[표트르 3세]]를 낳고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그렇다고 다른 친척들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표트르 1세]]의 이복 형인 [[이반 5세]]의 자녀 중 [[예카테리나 이바노브나 로마노바]]만이 딸인 안나 레오폴도브나를 낳았는데 여제가 [[이반 6세|누구]]를 몰아내고 국정을 잡았는지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안나와 그의 자녀들 또한 유폐되어 자손을 낳지 못하였다. 더군다나 할아버지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의 자식 중 자녀를 낳은 것은 [[표트르 1세]]와 [[이반 5세]]뿐이었고 [[로마노프 왕조]]의 개창자였던 증조할아버지 [[미하일 1세]]의 자식 중 자녀를 낳은 건 할아버지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뿐이었다. 한마디로 [[표트르 3세]]가 로마노프의 피를 이은 마지막 후손이었던 것이다. 설령 당시 로마노프의 피를 이은 다른 인물들이 있었다 해도 촌수로 따지면 너무나도 먼 방계라서 정통성 자체가 없다시피 했을 것이며, 류리크 왕조를 부활시키는 선택지는 아예 로마노프 왕조의 정통성을 통째로 부정하는 꼴이라서 매우 비현실적인 선택지였을 것이다. 그리고 위에서 설명했듯 여제 역시 조카의 상태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기에 조카 손자인 [[파벨 1세|파벨]]을 대신 후계자로 내세우려고 했다. 문제는 파벨이 8살때에 여제가 사망하여 표트르가 즉위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상황에서도 신하들이 후계자 교체 건의를 일관되게 주장했다는 것 자체가 표트르 3세의 상태가 워낙 심각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에 옐리자베타 본인의 건강 상태를 생각하면 황제 자리에는 파벨이 뒤를 잇게 하되, 어머니인 [[예카테리나 2세]]가 섭정을 하게 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이고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도 옹호의 여지가 없는 건 아닌 게 7년 전쟁이 예상외로 길게 갔다. 러시아의 가장 큰 목표이자 동맹의 주적은 프로이센이었는데 동맹이자 육군 강국인 프랑스가 일찍 유럽전장을 이탈하면서 프로이센이 생각보다도 더 오래 끈질기게 버틴 것이다.~~설마 3 나라한테 다굴빵을 당하는데 7년이나 버틸 줄은 몰랐을 것이다~~] 총신 [[알렉세이 라주모프스키]]와의 사이에서 타라카노바라는 딸이 태어났다는 설이 있다. 타라카노바는 예카테리나 2세 즉위 후 예카테리나 2세가 [[수녀원]]에 유폐시켜 버렸다. 그 후에 유럽 사교계를 떠돌던 한 고급 창녀가 자신이 타라카노바 황녀라고 사기를 치다가 역시 예카테리나 2세의 명령으로 러시아로 잡혀와 감옥에서 옥사한 일도 있었는데 19세기 화가 콘스탄틴 플라비츠키의 그림으로 유명해졌다.[[https://m.blog.naver.com/ykwun/70079846199|#]]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